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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28 06: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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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화함대 상상도


지금 세계의 관심은 미중 무역전쟁에 집중되고 있다. G2까지 치고 올라온 중국의 강세를 미국이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보면 동양은 서양의 탐험과 지배의 대상이었다. 서양은 동양과 아프리카, 남미와 같은 지역의 자원을 강탈하여 부를 축적하며 세계를 지배해 왔다. 서양은 하늘과 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동양과는 다르게 출발하였다. 그들은 대상을 탐구하고 연구하여 내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이런 생각은 탐구하는 과학정신을 갖게 했고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모험과 탐험을 즐기는 움직이는 동적문화(動的文化)를 꽃피웠다.


서양이 말하는 문화라는 뜻은 그래서 우리 정적 문화를 사랑하는 동양인이 말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서양인이 말하는 '문화'의 핵심 개념은 '경작'을 뜻한다. 동양이 말하는 문화라는 뜻은 '문양' 또는 '문맹을 퇴치하는 것' 이라는 뜻과 유사하다. 그러나 서양식 문화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아는 '문화의 꽃을 피우다' 라는 뜻은 그래서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경작하여 새로 통제하거나 지배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아직은 사유하는 방식에서 전통적으로 서로 다르다. 서양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는 데 반해서 동양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예를 들어, 서양인이 서울에 관광을 왔다면 관광 가이드는 경복궁, 민속촌, 인사동, 청와대 등 구체적인 관광지를 세부적으로 본 다음에 관광 마지막에 남산에 올라 지금까지 세부적으로 관광한 지역을 통합적으로 연결하여 종합 정리를 해주면 좋아한다


그러나 동양인은 제일 처음에 남산에 올라 서울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내려와서 구체적으로 세부 지역을 관광시켜 주면 관광 일정에 만족하게 된다. 서양인은 이름을 쓰거나 주소를 쓸 때도 부분부터 전체로 표시한다. 그러나 동양은 언제나 전체가 우선이므로 나 개인은 전체에 숨어져 있다


동양은 그래서 개인인 나는 전체를 위해서 언제나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적인 내용을 기술하는 서양의 분석적 사고의 특징은 물질을 이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쪼개고 또 쪼겠지만 이제는 서양문화도 점차 통합적 사고, 즉 전체적 사고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평생을 학계에 있어서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학문 분야에서는 벌써 통합적 사고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어서, 학과의 통폐합이나 학문간 통합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같이 기본적인 사유의 방법이 다른 동양이 탐험과 경작 그리고 지배라는 행동 특성을 지니게 되어 (처음부터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만약에 동양이 서양을 지배하는 일이 있었다면, 만약에 동양이 서양을 침탈하여 부를 이루며 살았다면 세계의 질서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도 상상해 볼 일이다


사실 미래학자들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전성기는 800년을 주기로 흥망성쇠를 반복한다고 예측하는 데 군사적으로는 몰라도 이미 경제적으로는 그런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경제전문가들도 많다. 뿐만 아니라 서양문화가 놓쳐버린 정신문화 영역을 계발하고 수련하기 위해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의 곳곳을 찾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동양이 서양을 지배하는 일이 벌어질 뻔 했다. 불과 600년 전에 이런 일이 실현되다가 갑작스러운 동양이 추구하는 정()의 가치관 때문에 그런 계획은 정지되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 증거를 찾아 흥미 있는 역사 여행을 한 번 떠나보기로 하겠다.


2002년에 영국 런던 왕립 지리학회에서 멘지스라는 한 퇴역 해군 장교가 놀랄만한 사실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콜럼버스는 미 대륙을 1492년에 발견했지만 그것은 이미 71년이나 늦은 발견이었다. 실제로는 명나라 제독 정화(鄭和)의 함대가 1421년에 미 대륙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정화의 함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술로 세계 일주까지 마쳤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는 견해를 밝혔으며, “정화 함대 = 아메리카 발견 + 최초의 세계일주라는 주장이 정식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정화가 남긴 두 개의 비문에 나타난 “3천개의 나라와 10만 리(185,000 km)”는 중국적 과장이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화 함대의 기록은 1477년 유학파인 관료세력에 의해 모두 불태워져 버렸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을 증명하기 매우 어려워졌지만 콜럼버스, 다 가마, 마젤란, 쿡 등은 이미 71년 전 중국의 정화가 발견한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근거는 미지의 지역으로 항해를 떠날 때 그들 모두가 중국인들이 만든 지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멘지스는 주장한다. 정화 함대가 반대 세력인 유학파에 의해 항해를 멈춘 뒤 빠르게 바다의 왕국 자리를 잃게 되어, 그 보다 훨씬 늦게 대양으로 나선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먼저 정복했다.


나중에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되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가 1381년 몽골군의 잔존세력의 근거지인 운남성을 공격하여 저항세력 중 성인 남자들은 모두 학살하고 사춘기가 되지 않은 수천 명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거세를 했다. 운남성 곤명에서 거세당했던 소년 중 마화(馬和)라는 소년이 명나라의 유명한 제독 정화(鄭和)로 성장한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의 항해를 하지만 여기서는 6차 항해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6차 항해는 142133(음력 정월 초하루) 북경 자금성 낙성식에 참가한 세계 각국 26,000명의 사절단을 고국으로 데려다 주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그리고 이 임무를 마치면 각국의 조공을 거둬들이고, 조화라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지구 저편 끝까지 항해해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함대는 모두 107 척으로 배의 길이는 151미터, 폭은 61미터에 이르며, 배수량은 3,000톤이 넘으며, 총 승선 인원은 27,000명에 이른다.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동원된 산타마리아호가 250톤 정도이고, 함선수도 3척에 승무원 12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니 정화 함대에 비해 그 초라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중국의 선단은 인도양을 건너 동아프리카로, 다시 희망봉을 돌아 카보베르데 제도로, 그리고 카리브해를 관통하여 북아메리카와 북극으로, 그리고 남쪽으로는 케이프 혼과 남극, 호주와 뉴질랜드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항해했다. 그리고 정화는 1431년에 7번째 항해를 떠난 후 1434년 인도 남쪽 캘리컷 부근에서 62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정화 함대를 저버린 중국은 거의 600년 동안 바다의 제왕 자리를 잃게 되어 유럽에 대항하기는커녕 왜구에조차 끊임없이 시달리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하며 곧 있을 서양의 침략에 두 손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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