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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26 07:03:46
  • 수정 2022-08-27 21: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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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안녕하세요!

‘마음한잔’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요즘 사시는 게 좀 어떠신가요?

낙낙하지만은 않지요? 그러다 보니 직성껏 잘 안되지요?

그래요. 사는 게 쉽지만은 않네요. 그러다 보니 직성이 안 풀릴 때가 많아요.


그래서 오늘은 이 ‘직성’에 대해 이야기 좀 해보려 합니다.


‘직성’은 흔히 쓰던 말인데, 이제껏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쓰고 있었네요.


우리는 사람이 성질을 부리거나 고집스레 어떤 것에 집착하여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해대고 나니 직성이 좀 풀리니?” “그 정도 해서 직성이 풀리겠어?”, “직성머리 하고는” 이라고 빈정대곤합니다.


저는 ‘직성’이라는 말이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기에 ‘깐깐한 성질머리’ 정도로 생각했는데, 직성이 깐깐한 성질머리가 아니라 하늘에 빛나는 ‘별‘이라네요.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의 운명을 맡아 보는 9개의 별이 있는데, 그 별이 직성이라는 겁니다. ’곧을 직‘에 ’별 성‘이라는 거에요.


9개의 별이름이 궁금하세요? 그러면 화면을 봐주세요.


‘우리말 유래사전’에는 ‘직성이 풀리다’의 의미가 ‘소망이나 욕망 따위가 제 뜻대로 성취되어 마음이 흡족하게 되다`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예전 민간신앙에서는 이 직성들이 차례로 돌면서 사람의 1년 운명을 결정하는데, 직성에는 흉한 직성과 길한 직성이 있어 흉한 직성이 들어온 해는 그 해 운수가 잘 안 풀리고, 반대로 길한 직성이 찾아오면 만사가 술술 잘 풀린다고 믿은 것이지요.


그래서 무속에서는 길한 직성은 맞이하고 흉한 직성은 쫓아내는 ‘직성풀이’라는 걸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직성’이 별자리라고 하지만, ‘직성이 풀리다’의 의미가/ ‘소망이나 욕망 따위가 제 뜻대로 성취되어 마음이 흡족하게 되다`이듯이, 제 뜻대로 즉 제 성질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것이니,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성질머리‘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어찌되었건,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성을 어찌들 풀고 사시나요.


과학문명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제가 어릴 적에 비해, 모든 것이 풍족해지고, 모든 것이 편리해지고, 힘든 일도 기계가 모두 처리해주고, 무슨 일을 하든 시간도 많이 절약되고, 한순간에 지구 이쪽에서 저쪽으로 편지도 보내고, 전화도 할 수 있게 된 그런 시대에 사는데, 왜 우리 마음은 더 궁핍해지고, 초조해지고, 초라해지고, 조급해지고, 각박해지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고도로 연결되는 시대인데, 오히려 우리는 모두 파편화되어 고도로 단절을 느끼고 살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은 이제 그만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급격히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느라 숨도 차고, 항상 경쟁에 노출되다 보니/ 피곤하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비교되다 보니 스스로 초라해지기도 하고, 세상은 이미 꽉 짜여져 옴짝달싹 할 수 없게 우리를 옥죄어 답답하기도 하고, ...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계속 흔들어대고, 우리는 그 속에서 중심을 잡느라 애쓰다 결국 넘어지곤 합니다.

시대가 그러다보니, 우리의 직성도 편치가 않습니다.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지고 무기력해져 쉽게 무너지기도 하고, 오히려 반작용으로 쉽게 짜증내고 쉽게 화를 내고 쉽게 과격해지기도 하지요.


명상센터든 요가수행이든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눈꼽만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초라해지고 마땅찮을 때, ’도종환‘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위안도 찾고 핑계도 찾습니다.


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네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4)


꽃도 사랑도 삶도 바람과 비에 흔들리고 젖으며 그렇게 그렇게 가는 거라네요.

여러분도 좀 위로가 되시나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모르긴 몰라도 모두 한 성질들 하고 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나뭇가지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놔두지 않는다고요?


직성이 안 풀리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직성을 부리며 살기는 하지만, 직성을 부리고 나면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주변사람들도 힘들어 합니다.


우리 모두 숫타니파타에 나오듯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어느 때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은데, 딱 상황이 오면 직성머리라는 것이 자동으로 작동을 해서 꼭 오바를 하지요. 사실 오바를 안 하면 그건 직성이 아니긴 하죠.

직성을 풀고 나면 그 순간은 속이 후련한 것 같은데, 곧 후회가 되죠.


뭐 그렇게까지 치달릴 필요가 있었나! 하고. 후회막급이죠.

이대로 살 수만은 없지 않나. 직성을 좀 순화라도 할 수는 없을까?


마음 수양 책도 보고, 명상과 참선도 해보고, 경전을 사경도 해보고, ...

그런데 잘 될 것 같다가도 참 쉽지가 않습니다.


자주 실패하기는 하지만 저는 두 가지를 해요.


하나는 직성부리는 제 꼴을 그냥 지켜보는 겁니다.

연습도 필요하고 쉽지도 않지만, 자꾸 실패하다 보니, 이제 좀 될 것도 같아요.

제 꼴을 지켜보면 직성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볼 수 있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처음에는 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런저런 안 좋은 감정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 듯 일어나는데, 그러던 것이 이제까지 자신이 해오던 습식을 먹고 금세 통제가 안 되도록 자라납니다.


그런데 그 아지랑이도 어차피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거라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답니다.


마음속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지면, 누르려고 하지 말고 그게 어떻게 자가발전해서 커지는지 한번 재미있게 관찰해보세요.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이.

여러 번 지켜보다 보면, 패턴이 보일 거예요.

사실, 직성의 기승전결이 빤해요.


슬금슬금 올라온 감정이 점점 커지는데 참으려고 해도 결국 끝을 보죠. 처음에는 후련한 것 같은데 곧 후회되고, 여기저기 미안해하며 그 엎질러진 상황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는, 대충 그런 줄거리고 패턴이지요


그렇게 관찰하다 보면 감정이 일어나는 초기 단계에서, 보채는 어린 애 보듯이, 그게 좀 객관화되어 보이고, 서서히 그 강도가 약해지고 사라지곤 해요.

물론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지요.


생각해보니, 이런 것 같아요.

직성을 부리는 건 병으로 치면 급성이잖아요. 급성은 때만 놓치지 않으면 만성보다 훨씬 고치기 쉽다고들 하죠. 자기든 남이든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것을 알면 순간 멈칫하게 되는데, 감정이 커져가는 과정에서 그 멈칫하면서 시간적 틈이 생기면 일어나던 감정이 동력을 잃게 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사람들이 쓰레기를 많이 버려서 담벼락에 크게 ‘사람 눈 모양’을 그려놨더니 쓰레기가 확 줄었다는 실험결과 보신 일이 있지요?


바로 그 원리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눈은 지켜보는 것을 의미하고, 남이 나를 지켜보든 내가 나를 지켜보든, 내 자신이 대상화되어 관찰된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이고 그러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게 되는 여유도 생기게 되거든요.


다른 하나는 지켜보기에서 실패하면, 그 다음은 그 꼴 부리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한 가지 옛일이 떠오릅니다.

예전에 미성년자 예닐곱 명이 경춘가도에서 강도상해사건을 벌인 일이 있는데, 그때 제가 그중 한 명의 변론을 맡았었지요.


제가 변호를 맡은 아이의 나이가 제일 많아 다른 공범자들이 모두 형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양 입을 모아 더욱 어려웠던 사건이지요.


그때 제가 재판부에 “엄마가 포기하지 않은 아이는 돌고 돌더라도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라고 최후변론을 한 일이 생각납니다.


그 최후 변론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 사건은 기대 이상으로 관대한 판결을 받았지요.

그 어머니는 그 후에도 오랜동안 고맙다고 전화도 해주시고, 동충하초로 술 담갔다고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더 반갑고 고마웠던 것은 그 아들이 직장 들어가 착실히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엄마마음의 힘이고 엄마마음의 기적이 아닐까요.


우리 마음에도 엄마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꾀부리고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한번 잘 해서 폼도 잡고, 칭찬도 받고 싶고, 잘못했을 때 용서도 받고, 실패했을 때 위로도 받고 싶은 아기마음도 있고,

그 모두를 바라보고 인정해주고 이해해주고 토닥여주고 품어주는 엄마마음도 있지요.

우리의 마음의 고향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엄마마음이 아닐까요?


이 엄마마음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 아기, 오늘도 힘들었지? 애썼다. 애썼어. 사람은 다 실수하고 산단다. 너도 곧 나아질 거야. 엄마는 항상 우리 아기가 최고란다. 사랑해.”하고 다독여줍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도 전제도 없습니다.


그냥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또 하나의 내 마음인 거지요.


이 글을 쓰면서 제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위로받고 어리광부리고 싶은 아기마음이 있다는 증거지요.


나이에 관계없어요. 지위고하에도 관계없어요. 돈이 많고 적고에도 관계없어요.


자신을 지켜보다 힘이 들면 그냥 한 번 더 무너져보세요. 이제까지도 그러고 살았는데 한 번 더 무너진다고 뭐가 대수겠어요.


그러나 그런 자신을 탓하지 마시고 힘들면 내 안의 엄마마음에 기대보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세요. “힘들었지. 애썼다. 아무 생각 말고 오늘은 푹 쉬렴.”


세상에는 냉혹한 심판자로 가득합니다.

적어도 자신까지 자신에게 냉혹한 심판자가 되지는 마세요.

좀 더 잘해보려 했는데 안된 거잖아요.


좀 더 노력하려고 해도 ‘그 좀 더’가 안되는 게 현재의 내 모습이잖아요.

나까지 나를 탓해서는 내 마음이 숨을 곳이 없어져요.


일단 엄마마음으로 돌아가 겁먹고 주눅들어 있는 그 아기마음을 품어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 아기마음이 휴식을 찾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도 직성 풀 일이 있었나요?

그 직성은 잘 푸셨나요?

어떻게 푸셨나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한잔, ‘나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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