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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17 0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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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의 서울 모습


나는 인왕시장 부근에 있는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자주 먹는다. 어느 날 안면이 있는 손님들도 삼겹살에 막걸리를 먹으러 왔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60대 쯤 돼 보이는 그는 갑자기 나에게 자신의 꼰대론을 강의했다. 그는 나에게 나이 지긋한 노인들 중에서 나는 예전에 ~~ 라든지”, “ 때는 ~~”라 하며 말을 시작한다면 그런 노인을 자기는 꼰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꼰대 세대들이 젊은 후세를 위해 해놓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마치 내가 그런 꼰대들의 대변인인 것처럼 나에게 분풀이를 해댄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은 다음에 내가 자라온 당시의 경제와 지금의 경제 환경에 대한 체험담을 말해 주려고 했지만 나에게 꼰대론만 강의하고 홀연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비교가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은 만족이나 즐거움의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결코 행복한 느낌을 만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과 고통을 통한 엄청난 정신적 수련을 통해서 스스로 지금의 이런 물질적 환경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고, 또 만족할 수 있는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제 내 꼰대 세대가 지난 삶의 어려웠던 환경을 회상해 보면서 한 늙은이의 푸념 섞인 꼰대의 넋두리를 풀어보려 한다.


나는 비교적 경제적 어려움 없이 생활하던 집안의 아이로 이천이라는 중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리 집은 비교적 큰 농사를 지으면서 꽤 윤택한 생활을 했고, 할머님은 매년 가을이 되면 모든 경비를 할머님이 준비하여 동네의 친구들과 만주 등 해외 여러 곳에 관광을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다. 아버님은 청소년 시절에는 서울에 있는 사범학교에 유학도 하셨는데 식사 후에 숭늉 한 그릇도 따듯하게 못 얻어먹고 고생을 한다며 학교를 자퇴시키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할머님께서 20대 청상과부가 되는 바람에 아버님은 5대 독자로 귀엽게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토지개혁을 통해 땅 한 조각도 없는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그 때는 상의할 친척도 없어 할머님 혼자서 아버님만을 의지하여 경제적으로도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생활을 했다.


내 어린 시절 학교는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교실이 모두 파괴되어서 5학년 때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만 하고 바로 학교 뒤편 계단이 있는 작은 산으로 향해서 그 산에서 공부를 했다. 가장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친구(같은 반 친구지만 나이 차가 많아서는 5살 위인 형 같은 친구도 있었다)가 흑판, 백묵 통, 물통, 청소 도구 등을 지고 산으로 갔다. 계단에 앉아 선생님이 수업할 때는 흑판을 걸어 놓은 나무 가지 위에 몇 마리의 다람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우리 아이들 눈동자는 흑판보다 다람쥐를 따라 움직였다. 이러한 야외 환경의 학교생활은 6학년이 되어서야 새로 건축한 교실로 옮겨가면서 끝났지만 이러한 야외교육 덕택으로 아직까지 5선지의 음표를 읽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몇 달씩 걸려서 배를 타고 도착하여 딱딱하게 굳은 우유 덩어리를 선생님이 망치로 깨뜨려서 나누어 주면 헝겊 책보에 싸서 등에 들쳐 매고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드리면 빵떡으로 쪄서 한 끼 식사로 대신 하기도 했다. 혹은 양조장에서 얻어 온 술 지게미를 죽으로 끓여서 주기도 하는데 나는 이때부터 여러 번 술에 만취해서 술주정(?)을 했던 기억도 있다. 바늘과 실, 어린이들이 노는 유리구슬(꽃다마) 모두 미국이 유엔을 통해 지급한 미제만 가지고 놀았다. 집 앞에는 전쟁으로 망가진 탱크가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포신 베어링을 하나 빼내면 동네의 구슬치기 왕좌로 등극하기도 했다.


오늘날 어린이가 사용하는 노트와 연필, 그리고 지우개는 당시에 무척 사치스런 학용품이었다. 당시 6.25 전쟁 후 미국의 도움으로 건설 붐이 일어났는데 여기저기에서 건물들을 짓느라 바빴다. 이럴 때에 아이들은 동네를 뛰어 다니며 신축 건설에서 쓰고 버린 시멘트 종이 포대를 주어 부모님에게 노트를 만들어 달라고 조른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시멘트 가루를 닦아내고 공책 크기만큼으로 재단해 가위로 잘라 한 쪽의 모퉁이 위를 실로 꿰매면 꽤 훌륭한 공책이 된다. 연필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전쟁 직후라 길거리 여기저기에 다 쓰고 버린 군용 건전지를 쉽게 구할 수가 있었는데, 폐건전지를 주어서 망치로 깨면 그 안에 석연(?)으로 된 심이 나온다. 그것만을 꺼내서 한 쪽 끝을 시멘트로 뾰족하게 갈면 매우 훌륭한 연필이 된다. 누렇고 투박한 시멘트 공책과 폐건전지를 이용해 만든 연필, 그리고 때 묻은 손가락과 침으로 지우개를 대신했다.


당시는 위생환경이 열악하여 각종 질병이 유행했었는데, 나 역시 등에 등창이 크게 나서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했다. 상처를 째서 고름을 닦고 그 안에 가제 심을 넣어 치료를 해야 했는데, 내 등창 수술을 위해서 이미 여러 번 사용한 수술용 칼을 숫돌에 갈아 마취 없이 나를 엎드리게 하고 간호원과 부모님이 내 팔과 다리를 꼭 붙들고 있으면 의사가 생으로 수술을 집도하였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며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는 것은 참외 한 쪽이면 족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을 고향 이천에서 보내고 부모님의 강한 교육열 덕에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을 왔다. 당시 서울에는 아파트는 없었고, 대체로 마당이 딸린 단층 한옥이고 연탄은 부자들만 향유하는 고급용품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지금 청와대 뒷산인 일명 말바위라 했던 산에 올라서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가방에 넣어 와야 저녁을 해서 먹을 수 있었다.


당시에 깡통 군수물자로 만든 석유 심지 곤로가 유행이었지만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는데 실패해서 마당에 깡통으로 만든 화덕을 걸고 나무를 때서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물을 끓이고, 그 끓는 물에 메주콩을 삶고 거기에 밀가루로 수제비를 떠먹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영양학상 괜찮은 식단이었다. 밥을 해서 먹을 때면 전기밥솥이나 냉장고와 같은 도구는 꿈속에서도 없었던 시절이라 여름철에는 한 두 끼가 지나게 되면 밥이 쉬어서 물기가 주르르 흐르는 식은 찬밥도 다반사로 먹었다.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님의 강한 교육열 때문에 열흘 정도만 배불리 먹인 후에 공부해야 한다면서 바로 서울로 강제 추방되곤 했다. 서울로 올 때면 간장에 졸인 양미리 반찬을 붉은 새우젓 독에 담아 버스를 태워 서울로 보냈다. 당시 이천에서 서울 종착역(구 서울 운동장 부근)까지는 비포장도로로 3시간 만에 터미널에 도착하게 되면 내가 살던 계동까지 새우젓 독에 든 양미리를 가져와야 했다. 시외버스들도 맹꽁이 차라고 지프처럼 앞에 엔진이 있는 앞으로 튀어나온 중고차인데 조금만 높은 고개도 잘 오르지 못해서 손님들이 내려서 밀어주었고, 애써 언덕 위에 올라서면 기사가 냉각수로 쓰려고 깡통으로 논물을 떠서 엔진에 부어 넣곤 했다. 그렇게 어렵게 터미널에 도착하면 택시는 견물생심일 뿐이고, 250전을 내고 전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내리면 낙원동을 경유하여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지겟꾼에게 운임을 흥정하여 계동까지 걸어서 갔다.


중학생 시절 생각나는 옛 추억은 주말 아침 새벽에 친척이 관여했던 왕십리에 있던 광무극장까지 걸어가서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계동까지 걸어왔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리고 하교하면 늘 방바닥에 바지를 가지런히 깔고 그 위에다 요를 깔고서 혹시 자면서 바지를 구길까 걱정스러워 움직이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잠을 자곤 했다. 다리미는 덮개도 없는 긴 손잡이만 있는 둥근 프라이팬 같은 모양으로 숯불을 넣고 두 사람이 마주하면서 잡아당기며 옷을 다렸다. 돈이 조금 있으면 수탉 한 마리를 장식으로 올려놓은 개폐식 다리미를 썼다.


고등학생 때도 계동에는 아직 수도 시설이 일반화 되지 않아서 동네에 있는 공중 수돗가에서 물을 사서 지고 와야 했는데 한 지게에 5원씩 받고 이 집 저 집에 물을 날라다 주는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기억도 있다. 하여간 그런 빈곤한 경제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다행히도 대학에 합격하는 행운도 맛보았다. 당시는 상업고등학교가 취업하기에 좋았고, 은행원이 되는 것이 큰 희망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은행원보다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은행부기, 상업부기, 주산, 타이프라이터 실기 같은 과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필요했던 영어, 수학, 국어와 같은 전략과목은 상업학교에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생각 끝에 묘수를 찾아냈다. 당시 종로에 위치하고 있던 파고다 공원 안에 종로 도서관이라 하는 시립 도서관이 있었다. 학생이 많아서 늘 아침 일찍 와서 도착 순번을 기록한 대기표를 받아야 했다. 나는 학교는 가지 않고 매일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기표를 나누어 주는 아침 7시에 계동에서 종로 도서관까지 뛰어와서 대기표를 받아서 다시 계동 집으로 뛰어가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왔다. 사실 도서관을 찾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대학 진학용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인문계열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웃 학생들의 노트를 얻어 보려는 목적이었다. 옆 학생이 영어공부를 하면 국어책과 노트를 빌려서 보고, 국어책을 보고 있으면 영어 자료를 빌려서 다시 돌려달라고 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외었다. 당시는 그 흔한 복사기도 없던 때라 무조건 외우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특별한 수단이 없었다. 이렇게 다른 학생의 자료를 얻어서 어깨 너머로 공부를 하면서 재수까지 거치면서 천운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행운을 맛볼 수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1년간은 즐겁게 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으로도 일했다. 과외로 돈을 벌어서 짜장면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2학년부터 제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대학교 안에는 자유 열람실이라는 개인 지정석이 있었는데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매 학기에 공개적으로 제공했다. 학기 초에 개인 좌석을 배정 받게 되면 그 학기는 내 전용 좌석이 된다. 이렇게 나의 독서실을 확보하게 되면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독서실에서 시간을 지냈다.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저녁까지 먹고 밤 10시 경에 집으로 가서 잠만 자고는 다시 학교에 오는 그런 대학시절을 보냈다. 학교 앞에 걸레빵집이라고 부르는 작은 빵집이 있었는데 100원이면 찐빵 두 개와 콩나물국도 주기 때문에 도시락에 밥만 담아오면 되었다.


3학년 말에는 무전여행을 가기도 했다. 대학생으로 무전여행중이라고 하면 핀잔은 받지만 대체로 버스와 같은 교통수단은 거의 공짜로 탈 수 있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단돈 몇 백 원만 주머니에 넣고 빈털터리로 전국을 여행했다. 무전 걸식하면서 다녔지만 큰 도시에 도착하면 대학 동창회를 수소문하여 도움을 청하면 후배가 고생한다며 환대를 해주기도 했다. 목포에서 제주행 가야호를 타게 되었는데 무전여행 학생에게는 배를 태워주지 않았다. 배가 부두를 막 떠날 때 잽싸게 올라타면 배를 다시 돌려 부두로 되돌리기 힘드니 선원에게 꿀밤 몇 대 얻어맞고 배를 청소해 주거나 심부름을 하면서 갈 수가 있었다. 제주지역의 농촌으로 들어가면 그 때는 아주 인심이 좋은 편이라 밥도 배부르게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감귤을 많이 확보하는 일이다. 당시 감귤은 무척 비싼 귀한 과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정식으로 확보하기도 했고, 몰래 귤 과수원에 들어가 배낭 한가득 채워 부산으로 향했다. 제주에서 육지로 나갈 때는 빨리 육지로 내보내려고 해서 쉽게 배를 태워주었다. 배낭에 가득 담은 귤은 아주 귀하게 쓰였는데, 식당에 가면 귤 하나에 설렁탕 한 그릇 바꿔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한 달 반을 여행하고 차비가 부족하여 용산 기차역에서 몇 시간을 걸어서 혜화동 자취방에 왔다. 저녁을 배가 터지게 지어서 먹고는 그대로 곤히 잤는데 일어나니 이미 이틀이 지난 후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가 내가 가장 오래 잤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을 졸업하기 1년 전인 3학년 말에는 친척 소개로 여학생을 소개 받았고 처음으로 연애도 했다. 경제 상황이 넉넉지 않아서 만나면 계속 걷기만 했다. 그는 나를 걷기를 무척 좋아 한다며 늘 재건 데이트만 고집한다고 놀려댔지만 사실 데이트 비용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은 항상 짜장면이었고 어쩌다가 여유가 생기면 여유롭게 잡채밥도 한 그릇 먹었다. 1년 간 재건 데이트 이후 졸업할 무렵에 결혼할 의향을 물었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내친김에 나는 솔직히 계속 공부를 하고 싶은데 나와 결혼하려면 나의 학비를 도와주어야 한다면서 교사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그래서 그 여학생은 졸업 후 교사양성소에 입학하여 생각하지도 않았던 교사의 길을 걷기로 하고 나와 결혼을 하게 된 지금의 내 집사람이다. 부모님께 석박사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으나 대학만 졸업해도 얼마든지 출세하고 잘 살 수 있다며 단호한 거절을 당한 터라 대학원은 나 혼자 힘으로 다닐 수밖에 없어 결혼 조건으로 학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군복무를 마치고 집사람의 도움으로 대학원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이를 둔 대학원 시절은 참 힘든 때였다. 13만원에 문간방에서 전세 신혼살림을 했는데 비가 오면 연탄 아궁이에 물이 들어와 학교도 못 가고 물을 퍼내고 연탄불을 살려 놓아야 했다. 집사람은 결혼 전에는 연탄 가는 경험이 없어서 내가 주로 연탄을 담당했다. 안집 아주머니가 가끔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버리기 아깝다며 새색시(집사람)에게 선심 쓰면서 건네주는 얼음을 받아들고는 가슴이 매우 아팠다며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집사람의 넋두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교 시절에 미국인과 지도교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한 식당에 가서 고기를 먹곤 했었는데 식사 후 후식으로 콜라를 마시면서 나에게는 콜라를 마시지 말라고 했다. 콜라는 육식을 하는 미국인을 위해서 만든 소화촉진용 음료이므로 채식을 하는 동양인에게는 맞지 않는다며 콜라는 동양인의 위를 깎아내릴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지금까지 탄산음료는 잘 마시지 않는다. 그때 조교의 월급이 12,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이 우유를 한 달 치 먼저 사 놓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라면 한 상자 20개 들이가 980원이었는데 점심에 한 개도 아까워 반개 씩 연구실에서 끓여 먹었다. 나중에는 영양 상태가 부족하여 퇴근길에 두어 번 쓰러진 경험도 있었다. 집사람은 지금까지 추억이 된 그 때의 힘들었던 생활을 가끔 떠올리곤 한다. 특히 큰애가 클 때 유모차도 세발자전거도 사주지 못해서 가슴의 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를 거쳐서 대기업에 스카우트 되었고, 그 회사에서 일본 동경으로 파견되어 장기 연수를 하기도 했다. 1973년으로 기억되는 일본 첫 번째 출장 시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일본 공항으로 나를 마중 나온 차에 대한 기억이다. 뒷좌석에 앉았는데 나를 안내하는 일본 친구가 power button을 누르니 창문이 스르륵하고 조용히 열리는 것을 보며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처음 시작하는 시발점에 섰다는 의미인 시발택시가 있었다. 쓰다 남은 드럼통을 망치로 두들겨 만든 고물 차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유리창 밑에 있는 손잡이를 힘겹게 두 팔로 돌려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열리는 차만 경험한 나는 신기하고 기가 차는 감동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은 주말에 함께 간 동료와 시내를 산책하는데 저만치서 여자 몇 명이 어깨띠를 두르고 바나나를 2개씩 포장하여 지나가는 행인에게 나누어 주는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그들은 대만 처녀들로 당연히 우리들에게도 바나나 2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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