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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섭일 칼럼] 오웰의 1984 방불케한 586정치 퇴출론 -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 ‘공산당선언’ 나온 해의 중요성 - 엥겔스의 ‘공산당의 오류’ 유서, 세계공산당 탈출 명분 제공 - 586정치인 퇴진하라는 빗발치는 민주당과 여론 이유 있다
  • 기사등록 2022-06-02 12:51:22
  • 수정 2022-06-02 14: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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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전진환 기자 =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공동비대위원장)이 25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국정균형과 민생안정을 위한 선대위 합동회의에서 586정치인 퇴진 등의 발언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프랑스의 석학이며 저명한 정치인인 토크빌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는 지금 화산 위에서 잠자고 있다. … 땅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폭풍우는 지금 지평선 위에 다가왔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인 라 마르틴의 국민당(보수)과 개혁당(사회주의당) 당수 루이 블랑은 세계 최초의 보혁 대연정에 성공했다. 2월혁명은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1789년 7월 14일 부르주아 주도의 혁명의 계승보다 사회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라 마르틴과 루이 블랑은 제2공화국을 선포하고 무산계급을 위한 조치들을 시도했다. 같은 시기에 ‘공산당선언’을 발표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운동을 시도했다.


[푸르동-마르크스의 철학 논쟁, 협동조합 개혁 주장 푸르동이 이겼다]


개혁당 블랑과 노동 영웅 알베르는 수도 파리와 각 시도에 국영공장을 건설해 실업자들을 채용해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국민공장으로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경제학자 푸르동은 “빈곤의 철학”을 출판해 노동문제를 위한 해법으로 협동조합과 노동은행, 국영공장의 경영을 제안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무산계급의 공산국가의 건설을 주장했었다.


마르크스와 푸르동은 방법론으로 논쟁했다. 혁명이냐 의회와 협동조합이냐를 놓고 방법론으로 대논쟁을 벌였다. 마르크스는 보혁대연정이 제2공화국 선포와 의회주의 방식의 개혁에 나서자 프랑스의 공산혁명의 시도를 포기하고 독일의 시민혁명을 위해 귀국했다. 그 후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일생을 보내며 제2인터내셔널운동을 총지휘했다.


프랑스대혁명은 미국, 영국과 함께 선진민주 문명의 선두에 섰고, 1975년 지스카르 대통령이 G7정상회담을 창설하는 등 선진국의 주역이 되었다.


2차대전 후 공산진영과 냉전 후, 베를린장벽의 붕괴, 독일통일, 소련 공산주의의 멸망, 동서유럽의 통합 등에 외교를 집중함으로써 서구 진영은 자유민주 진영의 승리를 견인했다. 19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G7정상회담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면서 공산 진영에 대한 자유 진영의 승리를 자축했다. 1990년 11월 22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담이 파리에서 열려 미•영•불 3국과 통일독일 및 고르바초프의 소련 등 45개국 정상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 인권, 평화를 21세기의 유일한 보편적 진리임을 선포했다. 공산주의를 ‘보편적 진리’에서 제외한 것이다.


공산주의는 나치즘, 파시즘과 동일한 전체주의로 규정되어 민주정통성을 상실했다. 루마니아와,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의 공산당 출신 대통령들은 헤이그의 유엔사법재판소에서 반인도적 범죄혐의로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중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베를린장벽 붕괴 후 국제사회의 공산주의 시대 정리작업이 완료되면서 냉전 후의 세계화 시대를 열었고,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전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586주사파 정치인 퇴진요구, 71% 국민도 명령]


3월 대선에서 국민의힘의 대선 승리 후, 더불어민주당의 586정치인에 대한 퇴진 바람이 불고 있다. 586정치인들이 대선 막바지에 정치교체를 들고 나와 586자중론과 퇴진론이 제기되었고, 3명의 원로급 586정치인들이 자진 퇴진했다. 지난 3월의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 71%의 국민들이 586정치인의 퇴장을 표명했다. 586정치인들의 퇴진을 국민이 명령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586정치인의 퇴장 요구가 국민적 여론으로 확산된 형국이다. 최근 박지현 비상대책위원장의 586정치인 퇴진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6.1지방선거의 막바지에서 박위원장은 "586의 사명은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역할을 완수했으니 퇴장하라!"고 요구했다. 지방선거에서도 패색이 짙어지자 ‘586용퇴론’을 계속 부르짖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 민주당은 대선 패배 직전부터 이재명 후보 측근 당간부들의 퇴진이 있었고, 송영길 당대표는 당수직을 내려놓기도 했었다. 특히 586정치인들은 정치 교체를 부르짖으며 용퇴론을 스스로 제기하는 등 혁신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재명 대선후보는 인천 계양구에 분당도피 후보로, 송대표는 서울시장 후보로 각각 재등장했다.


20대의 민주당 혁신의 구원투수로 발탁된 박위원장이 유권자의 586정치인의 반대 역풍을 막으면서 사과를 연발하다가 다시금 586퇴진론을 폭발시키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586전대협의 ‘민주당’ 위장정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행태이며, 더욱이 정권 장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문재인집권 5년을 잘 넘겼다.


박위원장은 계속 역설했다. “2022년의 대한민국 정치는 586정치인이 상상도 못 했던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게 목표이고, 2030이 최대 피해자이자 해결의 주체로서 586의 남은 역할은 젊은 민주당을 만들도록 길을 여는 것이다”면서 계속 586퇴진론을 역설한 박위원장에 대해 윤호중 공동위원장과 박홍근 원내대표, 김민석, 조승래 등 586정치인들은 '개인의견' '금시초문'등으로 박위원장을 매도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박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로남불도 여전하고, 성폭력 사건도 반복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팬덤정치도 여전해 달라진 것이 없다” 윤호중 공동위원장이 책상을 치고 나갔다고 보도되었다. 지방선거 약세가 586퇴진론을 폭발시키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에 앞서 586자중론, 퇴진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여론에 머리를 숙이는 몸짓을 했었다.


그럼에도 지방선거에 586정치인이 대부분 후보로 나서면서, 반성을 거부하고 재집권의 탐욕과 다수의 폭력으로 ‘검수완박’에서 보듯 권력을 휘두르며 ‘전체주의 본색’을 구체화하자 국민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것이다. 586정치인은 정치 수양도 공부도 깊지 않는 대학생 주사파 집단으로서 김대중 전대통령의 검증 없는 “젊은 피” 특채로 국회의원 후보로 무임승차한 것이다. 이는 하늘 아래 한국 유일의 야만 정치요, 정치사기이며 정치의 파탄이다.


21세기 결과, 백주의 투명정치시대를 4.19혁명, 6.3사태, 민청학련 등 연속적인 학생 혁명에 의한 민주의회에 586주사파 세력 지배의 문재인정권 5년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빅 브라더’의 전체주의를 방불케 하는 비극이었다. 1992-1995년간 공산당이 스스로 해체해 물러난 투명한 민주적 서구선진국에서 언론특파원과 5공 해직 학생 등으로 장기간 체류했던 필자에겐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시키는 문재인시대 5년은 힘든 나날이었다.


[고르비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실, 민주정치와 시장경제 이행]


오늘도 한국 정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2016년 후 모든 선거를 586정치세력이 TK-PK를 제외하고 휩쓸었다. 촛불데모 위세가 얼마나 셌던지 통장부터 대통령까지 모든 선출직 공직은 586세력이 휩쓸었다. 2차대전 후 반세기 걸쳐 서구나라에서 공산당이 집권한 경우는 단 한 나라도 없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자연스런 본래의 정치 모습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인민군이 스탈린의 탱크와 미그전투기를 앞세우고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해 유엔안보리의 결정으로 16개국 유엔군이 파병되어 천신만고 끝에 구출된 대한민국이었다. 이 나라에 촛불데모에 586주사파 정치인이 휩쓸어버리다니! 그리고 전직 대통령 2명이 모두 적폐 청산을 구실로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민주국가의 풍경이었다.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은 1992년 12월 24일 공산당 진영해산을 위한 TV방송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본질이 공산주의 체제를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정치경제 작업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서구시장 경제를 아무리 흉내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었다. 고르비는 공산 진영의 총수로서 대선에 스스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의회도 선거를 통해 구성했으며, 소련 원자력의 할아버지 사하로프같은 반체제운동가도 당선하는 등 사실상 정치 민주화에는 성공했었다.


그런데 경제는 아무리 모방해도 전혀 서구화되지 않았다고 연설에서 탄식했다. 이것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실이었다. 필자가 1988년 4월 중앙일보에서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2주간 소련을 취재하려고 방문했을 때,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취재가 그로미코 공산당 최고위의장의 크렘린 리셉션이었다. 당시 소련미국연구소 알바토프 소장이 나를 찾아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전략을 물었다.


그는 “우리는 지금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맹렬히 연구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했다. “왜?”라고 놀라며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경제발전에 성공한 유일한 정치지도자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그때 독재였지 않느냐, 우리는 세계 최장기 독재로서 박대통령의 경제정책 경험을 배워 선진국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가 보도 자제를 요청해서 쓰지 않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1970년대에 프랑스 대석학 레이몽 아롱은 방한 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의 경제발전의 방향 설정과 집행은 정확하다. 그는 한국선진화에 성공할 것이다. 서구선진국들도 19세기에 독재정치가 산업과 금융 등의 자본주의 경제발전 성공에 불가피하게 기여했다. 나폴레옹 3세의 독재가 아니었다면 프랑스의 선진경제발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정희 경제는 선진국 궤도를 잘 따라가고 있더라!”


박대통령의 정치탄압은 보도하지 않고 경제만 보도하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아롱은 한국 학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너무 대세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에 잘 쓰지도 않는다고 했다. 아롱은 방한기와 박통회견기를 르 휘가로에 대서특필했는데, 그는 교수와 언론인을 겸직한 특별한 대석학이었다


[엥겔스의 “공산당오류” 유서, “혁명시대 갔고 선거시대 왔다” 선언]


사실 학계의 순응주의가 나왔으니 첨언할 것이 있다. 2012년 필자의 졸저 “평양의 봄” 출판기념회에 언론계 남재희 선배가 참석했는데, 일독한 후 전화를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공저 ‘공산당선언’에 오류가 있었다는 엥겔스의 고백을 소개했는데, “사실이냐”고 전화로 질문했다. 사실이라고 확인하면서 “우리 학계에서 아는지 모르는지 의심된다”고 답했다. 남선배는 며칠 후 다시 전화로 “몇 학자에게 문의했더니 알고 있다고 말하더라”는 답이었다. “학자들이 알면서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러면 왜 침묵한 것인가.


‘공산당선언’의 공동저자 엥겔스가 오류가 있다고 밝힌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며, 정보다. 세계 공산주의가 진실성을 신뢰하고 소련을 해체한 배경에는 1992년 12월까지 75년간을 ‘공산당선언’을 믿고 수많은 혁명과 전쟁을 일으킨 세계사의 각종 희비극과 제국과 국가의 멸망의 역사에 대한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렇다. 1895년 3월 파리에서 출판된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습투쟁”의 불어판 서문에서 엥겔스가 밝히기 전에는, 누구도 ‘공산당선언’에 오류가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을 기대를 갖고 본인이 직접 파리와 독일에서 혁명에 참가하는 등 투쟁했기 때문에 역사적 중요성이 지대한 것이었다. 엥겔스의 오류고백은 곧 책 출판 후 사망했기 때문에 유서로 평가되었다.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이 유럽의 경제 상황을 사회주의 혁명을 성숙기로 본 것이 오류라고 말한 것이다.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역사는 우리와 우리처럼 생각했던 사람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했다. 역사는 유럽대륙의 경제발전이 아직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제거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848년 혁명이래 전역을 휩쓴 혁명에 의해 이를 입증해주었다”


1789년 7월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이 봉건제의 성숙기에서 부르주아의 봉기로 봉건제를 자본주의로 이행시켰고, 1848년 자본주의의 성숙기에 프롤레타리아의 총봉기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공산혁명 이론이 공동저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의 오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엥겔스는 “폭력혁명의 시대는 갔고 선거의 시대가 왔다”는 선언을 했다. 그는 ‘공산당선언’은 국가란 부르주아 계급의 프롤레타리아 착취의 도구임으로 자본주의를 타도 대상으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엥겔스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선거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제일 효과적인 해방의 수단이며, 권력에 다수가 진입함으로써 국가를 부르주아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비합법적인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결과보다 선거의 결과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 ‘체제전복의 혁명가이며 음모가’였던 우리는 합법적 방법으로 더 성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부르주아 질서당은 그들이 창조한 법적 조건에서 소멸하고 있다. 그들은 합법성은 우리의 죽음이라고 울부짖고 있다”


[엥겔스 제자 베른슈타인, “엥겔스 오류는 본질적인 것” 선언]


엥겔스의 유언집행자인 독일학자 베른슈타인은 유언의 바로 이듬해인 1896년 “자본주의의 제문제”의 저술에서 “자본주의의 멸망은 없다”고 발표해 “공산당선언”의 유토피아를 결정적으로 매장했다. 그는 이렇게 부언했다. “엥겔스가 지적한 오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붕괴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붕괴를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오류이다” 그래서 엥겔스의 서문은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솔직히 시인한 역사적 문서로 독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레닌의 1917년 10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엥겔스의 유서는 공산 진영에서 날조된 문서로 선전됨으로써 빛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후, 엥겔스의 유서는 프랑스학계를 중심으로 재조명되었고, 독일 빌리 브란트, 프랑스 프랑스와 미테랑, 영국 토니 블레어 등 서구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크게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모든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오는 결정적 문서가 되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는 오늘도 586정치인들이 바보, 장님, 천치가 된 듯 “공산당선언”과 주체사상에 세뇌되어 발에 족쇄를 차고 방향을 상실한 거북처럼 방황하고 있으니, 할 말도 없다.


*필자: 주섭일 (Why times 칼럼니스트 고문,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대기자-프랑스특파원,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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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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