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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5-27 21:42:55
  • 수정 2022-06-25 12: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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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검정 [사진=배철식의 라이프 블로그]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홍제천을 끼고 있는 서대문구 세검정로 1이다. 세검정(洗劍亭)은 한양 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북쪽 소문인 창의문(彰義門) 혹은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다. 정자를 처음 지은 때는 확실하지 않지만 1848(영조 24)에 고쳐 지으면서 세검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부채에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바탕으로 1977년 복원했다.


일제 강점기에 소실된 옛 자리에 2,640여만 원의 예산으로 J자형 팔작(八作) 지붕(한실 가족의 지붕구조)을 얹고 옛 모습을 살려 복원했다. 그러나 소실된 유적은 아무리 완벽하게 복원해도 문화재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서울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세검정(洗劍亭)은 뜻 그대로 칼을 씻은 정자라는 의미인데, 칼을 씻어야 할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다.


첫째는 세검정을 복호정(伏胡亭)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인조 14(1636)에 청나라의 군사가 침략했을 때 박남여 장군이 이곳에서 적을 맞아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복호정을 세우고 적을 벤 칼을 여기에서 씻었다하여 세검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번째도 군사 시설과 연관된 이야기다. 1505(연산군 11) 이곳에 연회 장소로 탕춘대(蕩春臺)를 지었다 한다. 1623(인조1)에는 이곳에서 중앙 군영인 총융청을 설치하고 군인들 휴식 장소로 이곳을 이용하였는데, 총융청은 1884(고종21)에 폐지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세검정 초등학교가 건립되었다. 숙종(1661~1720) 때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이어 성을 쌓고 부근을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 삼으면서 군인들의 위락 장소로 썼다고 한다. 21대 영조(1724~1776) 때는 무사들을 선발하여 이 일대에서 훈련시켰다고 하여 연융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이 한성 북방의 목구멍인 인후(咽喉)에 해당된다고 보아 영조 때에는 총융청을 설치하여 서울 방비를 엄하게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세검정인데, 당시 중앙정부 업무의 진행을 감독하던 총융청감관 김상채의 창암집에 의하면 1747(영조 23)에 육각 정자로 쉼터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는 인조반정과 관련된 이야기다. 1623년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서울, 경기 지역의 서인들인 이귀, 김류, 이괄, 최명길, 김자점 등이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영남파인 남인들의 협조 하에 광해군 폐위 문제를 의논하고 칼을 씻고 평화를 기원하던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분상 성리학적인 기준으로 볼 때 옳은 정치로 돌아간다는 뜻의 반정(反正)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15년 동안 광해군을 옹위하며 국정을 독점해 오던 북인들을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가차 없이 숙청하고 정계는 이후 200여 년간 서인과 남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네 번째는 칼을 씻은 것과는 무관하지만 이곳은 종이와 관련된 역사가 있는 곳이다. 세검정에는 인조반정 때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이었지만 그 후 간장 기술자와 창호지 기술자가 상주하여 메주 가마골이라는 별칭도 생겼으며, 장판지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도 생겼다. 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으로 1415(태종 15)에 조지소(造紙所)를 설립하였다가 1466(세조12)에 조지서(造紙署)로 명칭을 바꿨다. 따라서 이 후 세검정 인근에 종이 재료인 닥나무를 많이 재배하게 되었으며, 순조 때에는 종이 만드는 곳이 수백 곳이 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를 보면 역대 왕들의 실록을 기록한 후에 이곳 세검정 냇가로 와서 세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초란 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와 원고들을 없애는 일로 간혹 불에 태우기도 했으나, 종이가 귀해서 보통은 먹물로 쓴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를 지우고 재활용하였다. 세초를 굳이 세검정의 개천에서 행한 이유는 이곳에 종이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사초다. 사초는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 들은 내용과 자신이 판단한 논평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관 외에는 국왕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했으며 동시에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初草)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中草), 그리고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여기에서 초초와 중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는데 이를 세초라 한다. 물에 씻은 종이는 차일암(遮日巖)이라는 널찍한 바위 위에서 말렸으며, 말린 종이는 조지서에서 재활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세초를 마친 후에는 이를 축하하는 세초연이 열렸다. 효종실록에 의하면 세초연은 관례적으로 치러졌으며, 수고한 관리들에게는 하사품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름철 햇빛을 가리기 위해 차일을 칠 구멍이 파여져 있어서 차일암이라 한다. 처음에는 세초연을 여는 장소로 쓰였지만, 점차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야생 청둥오리들이 그곳을 쉼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자주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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