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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 아름다운 진리의 원형을 찾아 나서는 길 [고려대 영어교육학 05학번 김수인의 글] 2018-08-10
조평세 pyungse.cho@gmail.com



홀로코스트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역사상 어떤 학살보다도 미신적인 광기로 이루어진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수년간 지속될 때,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국제 사회가 보인 놀라운 침묵을 볼 때, 역사가 과연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인가에 대한 숱한 현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에 북한의 식량제가 붕괴되며 극심한 기아와 300만의 아사사태가 국제사회에 보고되었을 때, 국가가 전 인민을 계급의 억압에서 해방하고 공평하고 교육과 의료 및 식량도 무료로 배급된다는 무상사회의 유토피아적 꿈이 인류역사상 최악의 재앙과 비극으로 막을 내리며 많은 근대 서양 철학자들이 주창하던 인간의 합리 이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하는 깊은 인류역사의 심각한 주제의 숙제를 남겼다.


진정한 인간성의 완성과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인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신봉하며 달려온 근대문명을 지나 현대에 와서는 많은 이들이 역사의 방향성을 잃은 채 진리는 없다고도 말하며 멈추어 섰다.


▲ strauss [Consertiumnews]


1970년대에 부각된 네오콘 (Neoconservatism)의 대부로 고대 플라톤 이후 하이데거까지의 현대철학을 섭렵하며 정치철학사의 재해석을 논했던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Strauss)는 현대성의 위기를 짚으며 진보냐 회귀냐의 기로에서 인류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탐색한다.


신으로의 회귀 그리고 에덴으로의 회복을 강조하는 유대주의 사상에서 과거란 단순히 이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과거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순수했던 진리의 원형을 간직했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회개는 지금 무너진 모든 길과 불완전성과 비원형적인 것들을 고쳐 다시 복구하는 과정이다.


에덴의 추억이 있는 사람들의 그 순수하고 완전했던 에덴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포함한다.

에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에덴의 모습을 재건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에덴의 기억이 부재하다.

그들이 기억하는 태초는 야만적이며 무자비하며 극도로 빈곤한 세계이다.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나름의 성취를 자랑하며 미래의 발전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소망이나 기도가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는 삶이다.

미래의 완전성을 찾는데 있어서 태고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무조건적인 개혁과 혁명을 추구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개혁과 해방을 추구하는 원동력에는 일종의 과거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충성심이나 신실함을 따르는 삶은 퇴보적인 유물로 여겨지며 그들은 스스로 오래된 것들에 대한 오랜 편견이라는 마법에 묶여 있다.

다른 이들이 거역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그들은 혁명 또는 해방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혁명과 개혁을 남용되는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관습에 대한 타파, 적폐의 청산은 물론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떠한 분명한 기준과 가치를 상실한 채 매우 파괴적으로 이루어지는 데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한 개혁이고 무엇을 위한 해방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해방과 혁명 이후에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망각한 채 분노의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옛 속담처럼 우리가 태우고 있는 것들이 분노의 불이 되어서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던 거대한 울타리까지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진리의 원형은 어디에 있으며 그 진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스트라우스의 지적처럼 우리가 회귀해야 할 곳은 이미 지나쳐온 에덴의 저편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좇는 개혁과 해방을 향해 더 전진하고 질주할수록 점점 더 에덴의 입구로부터는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에덴의 동산을 꿈꾼다.

그곳에는 정부나 재판소가 있지 않았고 오직 오롯이 벌거벗은 두 남녀만 있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남녀가 자연 속에서 부끄러움을 잊은 채 스스로 언제든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의 손으로 짓지 않은 과실을 따먹으며 사랑을 나누는 곳이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온전한 연합과 나눔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많은 규칙과 규율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서로에 대한 온전한 결합과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언약만이 존재하는 단순한 세상이었다.

유일하게 지켜야 할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조차도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적극적 의무가 아닌 “무엇만 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소극적 의무만 있는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곳이야 말로 인간의 온전한 자유가 완성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규범을 깨뜨리는 순간 에덴을 상실하게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많은 윤리와 도덕적 규범을 타파해서 인간의 자유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혹은, 더욱더 많은 규범과 원칙을 만들어서 시장과 경제를 통제해서 공정한 분배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회복시켜야 하는 에덴동산은 꼭 있어야 할 규범이 철저히 지켜지고 도덕과 윤리가 온전히 지켜졌을 때에 그 이외에는 최소한의 의무만 남기고 자유가 허용된 상태일 때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규범과 자연법(Natural Law)이 온전한 질서를 이룰 때에 에덴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있어야 할 규범들이 해체되고 먹어야 할 과실과 먹지 말아야 할 과실을 정해 놓는 자유를 침해하는 없어도 되는 인위적 법도가 양산되는 이중적 모순 가운데 있다.


현재 대학 청년들이 크게 혼돈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개혁과 혁명이라고 하면서 질주하고 있는 이 방향성이 정말로 맞는 것이냐?

시대를 고민하는 고대 지성인이라면, 인류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지에 대한 자성과 그 방향성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진정한 자유로 이르게 하는 법도의 균형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끊임없는 해체와 청산만을 추구하는 현 세대에 대해 인간회복의 방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의 균형과 질서를 회복하고 추적하는 과정에 있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모든 것이 가하다 하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끊임없이 혼돈과 어둠 속에 있기 좋아하는 현대성의 모순을 돌아보며 인류역사의 진보라고 걸어온 그 길에 나타난 역사적 모순과 비극을 통렬히 반성해야 하는 참으로 중대한 시점에 있다.


그리고 태고의 창조적 질서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대한민국의 미래에 에덴의 형상을 재건할 수 있는 그런 청년들이 더욱더 필요한 때이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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