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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의 미국 이민 이야기 #2 2018-04-22
봉달 callmeplz@gmail.com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사교육과 치맛바람. 서울대 정치학과 96학번 입학 후 3학기 연속 학사경고
–신림동 판잣집, 딱지 사서 들어와 배째라 못나간다 드러누운 인간들한테 한마디 했다가 혼나기도
-대기업 상사 들어갔다가 죽을 것 같아서 때려치고 시카고 친구집에 ‘기생’하던 기자와 임무 교대

오늘은 두번째 이야기.

원래 짧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의외로 할 말이 많아 아예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가칭 [봉달의 이민 이야기].


지난 번 마지막 부분인 나의 미국 도착 시점부터 시작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배경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이번엔 약간 사적인 얘기로.


내가 대학을 졸업한 것은 2004년 2월. 96년 입학인데 군대 2년 빼고 중국 어학연수 핑계로 술과 바꿔먹은 1년을 제하면 만으로 꼬박 6년만이다.

3학기 연속으로 학사경고를 먹었는데 그때만 해도 퇴학 등 실질적인 제재 효과가 있는 게 아니어서 그냥 학교를 2년 더 다녔다.

나중에 재수강을 하느라 여름학기까지 몇 번 들었지만 최종 학점은 대략 fail.


소싯적부터 원래 공부에는 별뜻이 없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되 무협지나 판타지를 주로 봤고 만화책이나 의학서적, 과학책도 좋아한다.

어릴 적 꿈은 만화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부모님이 대학교는 졸업하고 만화를 그리랬는데 고등학교 때 본 첫 수능모의고사 점수가 이상하게 너무나 잘 나왔다.

오예.


 나란 놈도 뭔가 폼잡을 수 있는 의사나 한번 돼볼까 했지만 고1 때 담임이 수능 잘 보는 애들 머릿수가 모자란다고 걍 문과 넣어버렸다.

지금도 그게 좀 아쉽긴 한데 칠칠맞은 내 성격상 차라리 잘 된 것 같기도.

돌팔이 의새노릇 하다가 몇 사람을 잡았을지 모를 노릇이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서울대에 가게 됐다.

아비는 가난하지 않았고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사교육과 치맛바람이었다.


원서 작성시 성향상 경제나 경영을 쓰려 했는데 아버지의 즉흥적인 결정으로 정치학과를 갔다.

아무래도 아버지 본인의 컴플렉스 해소용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전공을 정한 건 나밖에 없다는 걸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다들 꿈이 크더만 뭔 대통령이니 대법원장이니 외교관이니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자기가 할 일 알아서 척척척 치열하게 사는 스스로 어른이인 사람들을 보면 좀 부끄러울 때가 있다.

이번 글도 안 쓰려다가 이왕 시작한 것, 미국까지 흘러들어온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조금 드러내는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고 정말 창피하고 이불킥 할 일도 많지만 그건 울 마누라도 모르고 나중에 며느리도 모를 터다.

암튼 나는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대학교 때 방향을 잃고 술마시며 포커나 치고 다녔다.

학교는 가봤자 철거민이 어떻고 미제파쇼가 어떻고 저떻고… 뭐 잘 모르겠고 놀기 바빠 안 갔다.


열사 투사 의식 있는 대학생 코스프레도 잠깐 해보긴 했다.

IMF 때 아고라에서 출발해 동작대교 뛰어넘어 고대 찍고 종로에서 토끼몰이 당하다 지하 술집 아저씨가 들어오라고 해 피신한 적도 있다.


신림동 판잣집 대책회의를 따라갔을 때다.

딱지 사서 들어와 배째라 못 나간다 드러누운 인간들한테 한 마디 했다가 선배한테 혼났다. 울엄마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복부인들 따라당기면서 콩고물이나 주워먹는 사람인데 느그덜 같은 새끼들 때메 골치가 아프다고 그랬다.

지금 봐도 틀린 말이 아니구만 그담부턴 어디 같이 가자는 얘기 안 하더라.


어느날 어머니 되시던 분이 나 몰래 입영원을 넣었다.

이거 불법 아닌가 본인 동의도 없이. 엄동설한 12월에 군대에 끌려갔다.


썰을 풀자면 이것도 긴데 간단하게 포병 수송부 5톤 중차 운전병이 돼서 부속품 취발하러 다녔고 뚜드려 맞기도 많이 맞았다.

군대에서 고문관 노릇하다가 나중에 견장 달고 구타는 내 대에서 끊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무반 분위기가 안좋으면 TV 드라마 대신 EBS를 틀어줬다.

후임이 짬 좀 먹었다고 말 안 들으면 때리지 않고 일일영단어를 외우게 했다.

다 지들을 위해서 그런 건데 차라리 얼차려 주고 때려달라고 해서 속상했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했던가.

상말부터 밑에 애들이 속옷까지 빨아주니 노년 아니 말년에는 지내기가 편했다.


제대한 뒤 취업이 갑자기 힘들게 됐다.

한 92, 93학번까진 띵가띵가 보도블럭 깨다가 정 할 거 없으면 대기업 골라서 들어가고 그랬는데 군대 갔다오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후배들은 학생운동 대신 도서관에서 책만 팠고 나는 걔네들과 학점은 물론 취직 역시 경쟁하기가 힘들었다.


뭐할까 하다가 고시는 능력도 안 되고 관심도 없고 하니 전공을 살려 기자나 한번 해보자 덤벼들었다.

당시 대기업 평균 초봉이 3천 좀 안 됐는데 조중동 매경 등은 모두 그 이상 아님 훨씬 위였고 심지어 한겨레 경향 등 형편이 좋지 않은 언론사도 롯데보단 많이 줬다.


무슨 사명감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서울대 나왔는데 평범한 월급쟁이는 좀 그렇고 가오나 살려볼까 해서 해본 거다.

졸업 후 1년 동안 면접들도 가고 그랬는데 결과적으론 다 낙방했다.


입에 풀칠이나 하자고 대기업 계열 상사를 들어갔다.

좋은 분들이 많았지만 다니기가 넘 힘들었다.

원래 출근 시간은 8시 그러나 신입은 아침 7시반까지 나와야 했다.

퇴근은 저녁 8시 정도 그것도 기러기 부장님이 “자 이제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하셔야 회사 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집에 바로 가지 않고 술자리는 업무의 연장이라는 회사방침(?)에 따라 의무적으로 부장님 이하 팀원 전체가 저녁 + 반주를 같이 했다.

1주에 이틀은 그렇게 보내고 하루는 바이어 또는 셀러 룸빵 접대, 나머지 이틀은 과장님 이하 개별 유대 관계 형성을 위한 소맥 전투를 하다보니 죽을 지경이었다.

요새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상사 특성상 별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정도가 많이 약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1년에 두번 해주는 직장인 건강검진을 저동 백병원에서 했다.

의사가 따로 조용히 부르더니 이 회사 계속 다닐 거냐고 묻더라.


지난 자료를 보면 당신 선배들 한 5년 있다 죄 당뇨 고혈압 생기는데 동생 같아 해주는 말이니 딴 데 알아보란다.

의노 주제에 어따 대고 감히 나는 상사맨으로서 뼈를 묻으리라 하기에는 내 의지가 너무 약했다.


그래서 1년만에 때려치고 다시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다.

어떤 회사 최종면접에 다시 갔고 또 떨어졌다.

이젠 오지 말라는 주의(?)와 함께… 멘붕이 왔다.


나는 이제 뭐하지, 그냥 죽어야 하나 고민으로 지새우던 나날이었다.

갑자기 큰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다.

병신처럼 빌빌대지 말고 LA 막내삼촌 집에나 몇달 갔다오라며 비행기표를 끊어주신댔다.


시카고에 가있는 마찬가지 빌빌이 전직 고시생 과 친구 생각이 났다.

잠깐 들르게 LA 경유해 시카고 가는 걸로 해달라니 비행기표가 그렇게 부킹이 됐다.

그렇게 나는 시카고에 오게 된 것이었다.


빌빌이 고시생 친구는 한참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에 있었다.

저 웬수 같은 기자놈을 빨리 처리해야 할 텐데, 생활 패턴이 밤낮으로 서로 반대라 마주칠 기회조차 별로 없어서 답답하게 시간만 보내던 차였다.


그러고 있을 때 내가 전화해서 LA 찍고 들를 테니 잘 씻고 아니 깨끗이 하고 아니아니 방청소 잘 해놓고 있으라고 통지를 해온 것이었다.


당시 친구와 기자가 살고 있던 한인 용자 아재의 지하실에는 방 2개와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친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내가 도착하면 바로 기자의 방을 쓰는 대신 기자는 마루 한쪽 구석에 공간을 만들어 거기서 자든지 말든지 한다는 것이다.


기회를 계속 엿보다 슬쩍 자기 방으로 잠입하던 기자를 포착하고 현장을 덮쳤다.

렌트비와 각종 유틸리티 등 그간 밀렸던 재정 분담 상태를 주지시키고 채무 상환을 하든지 아님 내가 도착하면 바로 방을 양보하라고 제안했다.


돈도 안 내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기자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재테크를 위해 다시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카지노로 가기 전 기자가 친구에게 넌지시 알렸다.

자기는 어차피 미국 오래 있지 않을 거라고. “오잉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다니고 있는 신문사에서도 사람을 뽑겠네?” 물어보니 그렇단다.

친구는 전화로 징징대던 나를 떠올렸다.

“님 내 인생 이걸로 아마 대충 끝난듯? 미국 가서 똥이나 푸면 잘 살 수 있나?”

징징징 징징징.

내가 원래 좀 한 징징 한다.

친구는 내게 연락해 미국 올 때 현지 신문사 사람을 뽑을 수 있으니 자기소개서랑 졸업증명서 같은 걸 준비해오라고 했다.


나는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잘됐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물어보니 해외 언론사 지점들 대우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굿한 김에 떡 먹는다고 놀러간 김에 면접이나 보기로 했다.


잘 되면 몇 년 미국에서 개기는 거고 안 되면 한국 돌아와 목이나 매야지.

굳은 결심으로 인천공항을 떠났다.


▲ 오헤어처럼 복잡한 공항은 사정 봐주지 않고 차가 걸리적거리면 바로 치워버린다


시카고는 시작부터 별로 좋지 않았다. 오헤어공항에 내려 친구와 오랜만에 상봉했다.

거지 두 마리가 서로 반가워하며 궁상을 떨다가 터미널 밖으로 나가보니 친구 차가 사라져버렸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카고는 알카포네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단 말인가.

두 놈이 넋이 나가 헬렐레 하고 있는데 공항경찰이 다가오더니 터미널 출구 앞에 정차 주차 금지 모르냐며 견인해갔으니 어디어디 전화해서 알아보란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양키들 잠깐 5분 세웠다고 그새 차를 끌어가?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 공항들, 특히 오헤어처럼 복잡한 공항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걸리적거리면 바로 치워버린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과 차가 다님에도 불구하고 공항의 교통 흐름은 그리 나쁘지 않고 원활하다.

훗날의 일이지만 칼 같은 법 집행은 모두가 지키는 질서의 근간이 되고 그것은 결국 나의 이익이 된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찔찔 짜면서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아 15분 거리 친구가 살고 있는 셋집으로 갔더니 택시비가 50불 나왔다.

‘야 이런 도둑놈의 새끼들 내가 조선 촌놈이라 코를 베어가겠다 이거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옛다 먹고 떨어져라 돈을 줬다.


그런데 파퀴인지 방글이인지 기사놈이 짐을 안 내려준다.

나는 영어가 안 되니까 친구에게 쟤 왜 저러냐 물으니 팁을 안 줘서 그런단다.


와 이런 개썅!#$!@#(*!@#!@

그래 내가 아시안 촌놈이라 니가 나를 등쳐먹을라고 작정을 했구나 싶어 되도 않는 영어로 막 뭐라 했지만 택시기사는 걍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계속했다.

 “김미 팁”.


택시에 무려 60불을 뜯기고 내가 짐을 내리는 사이 친구는 차를 찾으러 견인회사에 갔다.

기본 견인료가 200불 정도 나오고 바로 안 찾으면 하루에 100불씩 추가된단다.

거기에 주정차위반 딱지값도 50불 추가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 일이니 지금은 더 비쌀 것이다.
친구의 실수 또는 판단 미스로 일어난 일이지만 내 일을 해주러 온 것이니만큼 반반씩 물자고 했다.

친구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지만 지도 속은 쓰렸겠지 싶다.


사람이 간사한 게 본인 직장 눈치도 보일 텐데 짬을 내 나를 데려온 친구에게 고마우면서도 아 새퀴 미국에 1년 넘게 살았으면 이런 건 좀 잘했어야지 하는 원망도 좀 들었다.

이래서 조센징은 안 되는 것 같다.


시카고에는 2006년 당시만 해도 한국계 언론사들이 꽤 많이 있었다.

서브프라임 전까지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언론사들 광고 수익이 꽤 짭짤했다.

또 인터넷 잘 모르는 틀딱들이 주 구독층이었던 관계로 종이 신문이 여전히 인기가 있을 때였다.


나는 그 중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두 군데 지원을 해서 간단한 필기 시험 후 면접을 봤다.

두 군데 모두 오라고 했는데 조건상 큰 차이는 없었다.


둘 다 영주권도 해준다고 하고 몇년 다니다가 본인이 희망하고 본사에서도 ㅇㅋ하면 한국으로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다만 한국일보에서 먼저 연락이 왔고 가겠다고 오퍼를 수락한 상태여서 중앙일보에는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 중앙일보가 본사의 경제적 지원 덕분에 월급이 20% 정도 많은 걸 알고 후회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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